48복산 산행후기 07년 12

樂山樂水 복산 194차 산행 잡기

福山골 07년 마지막 북한산 산행 (194차) 길훈, 기문 등 조촐함이 한편으로는 요즈음 우리 또래들 금요일 저녁시간을 변명으로 삼게 하고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에 소외(?)된 수원과 허경의 부지런함을 칭찬케 한다. 마침 冬至에 겹쳤으나 날씨는 황진이가 동짓달 긴긴밤 베혀낸 한허리 서리서리 넣어둔 이불속 春風같은 날씨이니 정작 그 이불속이 마냥 궁금하고 그저 부럽다. 승가봉 남면에 걸터앉아 멀리 백운대를 바라보며 07년 무사산행을 이끌어 주신 산신령께 감사와 더불어 지난 한 해를 향한 망연한 기억들의 반추. 사실의 공시성과 진실의 통시성을 양축으로 삼아 대선 후 변화의 포락선의 좌표를 잠시 그려보다 비봉 옆 길훈 코스로 조용히 내려와 간단히 막걸리로 뒤풀이후 집으로. 덧붙여 복산골 CI이자 話頭인 樂山樂水..

호남 추월산 산행잡기

떠남이 늘 홀수로 남고 그래서 잊혀지는 것이라면 만남은 짝수로 마주치며 되살아나는 것이리라. 주필, 영기, 종철, 윤식, 윤종, 정호, 동석, 춘민 등 아홉이 떠나니 이내 성큼 다가와 따뜻함으로 맞잡아 주는 만택, 기범, 웅주. 아홉 홀수가 열둘 짝수로 되는 반가움에 갑절의 기쁨이 더한다. 前生의 저승인 이승까지 그 인연이 뻗어 오니 서로 마주치는 첫 눈빛이 그저 조용하고 부드럽다. 모든 생명체가 그 벅찬 탄생의 기쁨을 짝수에서 얻듯 재회 또한 마찬가지다. 다들 넘치는 반가움에 눈가에서 접혀진 주름이 입가에서도 펴지기를 멈추지 않는다. 秋月山 가는 길 만택이가 마련한 합승버스에 오르니 ‘너 잘 만났다’며 쏟아지는 만택의 구수하고 걸쭉한 육자배기 입담과 ‘그건 내 할 말이다’라며 한사코 붙잡고 늘어지는 동..

The environment knows no borders! 185차

The environment knows no borders! 지난 9월 말 길훈과 허경 등 셋이 오른 북한산 비봉 능선에서 세 명의 외국인 젊은이가 등산로 주변 쓰레기를 줍는 것을 보았다.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고 난 후 세 번째로 목격하는 ‘좋은 일’하는 사람들인데 외국인은 처음이었다. 허리춤에 찬 지자체 공인 쓰레기봉투에는 이미 캔과 비닐 등 각종 쓰레기가 담겨져 있었고 연신 등산로 옆을 두리번거리며 쓰레기를 찾는 모습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잠시 멈칫했다.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무엇보다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감동의 기쁨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 박수라도 쳐 주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구제 금융사태가 불러온 붕괴와 몰락의 두려움이 산 아래 모든 곳을 휩쓸고 가면서 ..

7월 같은 8월을 보내며

마침내 풀무질을 끝내고 검붉은 쇳덩어리 하나를 모루에 올려놓았다. 첫 모금은 그대로 들이키고 두 번째 모금은 목젖을 뒤로 제치곤 힘차게 뿜어냈다. 메케하고 찐득한 습기가 눈앞을 뿌옇게 닫았다. 이어 가시권 밖에서 광음으로 노리더니 일촌으로 치받으며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일거에 모든 스펙트럼을 장악했고 一切를 가차 없이 내리치며 탕탕 달구어댔다. 죽은 아스팔트도 살아 흐느적거렸다. 모든 길은 이제 거대한 끈끈이가 되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낌새를 챈 도시는 없는 탈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허둥대며 들락날락 분주했다. 그늘에서 그늘로 숨어 다니며 거리는 하얗게 비워졌다. 8월은 늘 그렇게 거침없이 작열했고 끝없이 목말랐다. 그런데 2007년 8월은 예의 그 8월이 아니었다. 무덥고 답답함만이 오직 가까웠다..

시계속의 시간과 손끝지대를 넘어서, 177

종종 애초 약속보다 한 두어 시간 남짓 적지 않은 공백이 생기면 대개는 이 시간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곤 했었지만 그 약속 장소가 책방이 인접해 있는 광화문이나 종각 근처인 경우에는 때론 감사하고 때론 길에서 거저 주은 돈처럼 그 시간을 받아들이곤 했다. 누구처럼 그 책방의 책을 사모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니 성급히 짐작마시고 그 까닭을 잠시 들어보시라. 아시다시피 직장을 옮긴 지 늘 오래지가 않기 일쑤여서 매번 영업에 쓰이는 갖가지 기술용어들의 윤곽조차 채 머릿속에 자리 잡지 못하고 여전히 입가에서만 헛바람처럼 맴도는 것이 마치 벼락공부한 날치기시험을 보는 것처럼 참 먹먹한 심정이었다가 시험 일분 전에 그 시험 시간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 시간 때론 반나절 연기되는 경험을 한번이라도 겪..

삼삼한 봄날, 호젓함을 추억하며..

그렇습니다. 역시 봄은 그저 다소곳이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하루 하루 손꼽듯 기다려지는 계절이 아니란 뜻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는 지난겨울 내내 추위에 얼었거나 웅크려있어서만도 아닙니다. 매 봄을 맞을 때마다 이미 지난 계절들이 지닌 저마다의 내력과 역할을 곰곰이 되짚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여름은 봄이 이겨낸 탄생의 産苦에 감동, 이를 자신의 온몸을 아끼지 않는 땀과 수고로 잘 가꾸어냄으로써 봄이 미더워함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열하는 태양의 눈부심을 자랑으로 내세워도 전혀 뻐김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가을은 또 어떠합니까. 여름의 勞苦에 담긴 진정한 의미, 즉 탄생의 신비함을 향한 태초의 경외심이 그 안에 담겨 있음을 잘 깨달아 이를 더욱 경건하며 소중하게 하는 창조의 -..

3월1일 그리고 나눔과 소통과 '서울', 169차

80여 년 전 3월1일 오늘, 당시 민중들이 가슴 터지도록 외친 아우성에는 일제 식민지 아래서 20여년에 걸친 이방인의 지배와 屈從에 대한 분노만 담겨있던 것이 아니라 절대 권력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저항력의 한계에서 오는 무기력감과 그 권력의 당위성으로 도입된 소위 ‘근대화’의 공세에 대해 일방적 수용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즉 당시 세계 변화의 추동력에 대한 총체적인 無知에 대한 각성과 고립감에 대한 끝없는 불안이 함께 어우러져 토해낸 처절함이 그 진정한 속내가 아니었는지. 귀청을 때리는 단말마적 비명은 아니지만 그 지속성에 스스로의 청각마저 포기할 정도로 저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고통과 환멸의 신음, 이를 즐기는 자본의 온갖 일회성 욕망으로 일주일 내내 난타당하며, 도주의 피로와 불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