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174

터번, 그 철조망 무늬

40년 전 사우디에서 일했던 현장이 군사공항이어서 직원들의 출입증 발급에 필요한 서류처리를 위해 고용한 현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공항측 발급 관리 사무원(아마 요르단 출신)이 어느날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며 가보자고 해서 따라 간 곳이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기념행사를 하는 자리였다.  현장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려 간 곳인데 건물 벽에는 성조기에 해골을 그려넣은 포스터들이 붙어있고 널찍한 마당 곳곳에 횃불을 피우고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이 모형 목총을 들고 총검술 시범을 하는 그런 이벤트가 있었다.  마침 유일한 동양인인 나를 보고 다들 어디서 왔냐고 묻는데 Korea라고 했더니 North or South라고 다시 묻길래 south라고 했더니 이구동성 you puppet, ame..

글쎄 2024.03.02

동네 뒷산, 목골제색도

사는 집 옥상에서 멀리 그 자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산들에는 관악, 북한, 남산, 안산, 계양산이 있고 그중 관악산이 가장 가깝다. 북한산은 문수 그리고 나한, 의상봉 일부가 가까스로 눈에 들어오고 관악은 삼성산 부근과 그 줄기 자락 일부 그리고 남산은 전망대와 그 옆 봉우리, 계양산은 그 꼭지 일부이다. 모두 멀리 떨어진 아파트들과 고층 빌딩, 옆집, 앞집, 뒷집 다세대 건물 옥상의 이런 저런 구조물 사이로 마치 온전한 풍경을 담은 사진을 가위질로 조금씩 조금씩 잘라낸 것 같은 아득하고 짤막한 풍경이다. 최근 3-4년에 걸쳐 이웃의 이웃에 새로이 빌라와 조금 멀리 재개발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북한은 비봉능선과 문수봉, 대남문, 보현봉이 선명했고 시야가 좋은 밤에는 문수사의 불빛도 먼 하늘 별처럼 ..

글쎄 2021.08.16

낙화, 그 심연

하늘에 떠있는 별을 재발견한 후 끈질긴 관찰이 이루어지고 망원경과 수학이 굴절과 파동을 매개로 빅뱅, 평행우주, 흑물질 등으로 바로 앞의 이론과 가설을 지우고 뛰어넘는 동안 결코 바뀔 수 없는 어떤 말을 예견함이 불변의 운명임을 암시하는 조짐들이 있다. 창조와 변화에 대한 지칠 수 없는 호기심과 집요한 의혹이 없었다면 어떤 지식은 여전히 선사시대 이전에서 머물렀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어떤 종교적 구절도 선사시대의 낮은 지식이 좀 더 높이 오르려다 실패한 수수께끼 정도로만 전해졌을 것이다 어떤 최초를 모두의 최후로 예감하는 것은 침묵의 부동자세로 종교의 영역 근처에서 가능하지만 모두의 최초를 어떤 최후로 서술하는 것은 다가올 무수한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용기를 북돋운다. 꽃이 피어 지는 날 까지 몇 낮의 삶..

글쎄 2021.05.25

부들, 늙음의 자리 짜기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신 경림 자리를 짜보니 알겠더란다 세상에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미끈한 상질 부들로 앞을 대고 좀 처지는 부들로는 뒤를 받친 다음 짧고 못난 놈들로는 속을 넣으면 되더란다 잘나고 미끈한 부들만 가지고는 모양 반듯하고 쓰기 편한 자리가 안 되더란다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서러워진다 세상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기껏 듣고 나서도 그 이치를 도무지 모르는 깨닫지 못하는 내 미련함이 답답해진다 세상에 더 많은 것들을 휴지처럼 구겨서 길바닥에 팽개치고 싶은 내 옹졸함이 미워진다 1993, 쓰러진 자의 꿈, 창비 시인의 시를 읽고 문득 부들의 영어 이름씨와 누군가 틀림없이 함께 올렸을 이미지들이 궁금해 구글링하니 흥미로운 글이 함께 올라..

글쎄 2021.03.02

몽상의 흔적, 기도의 냄새

비록 끊임없는 암기 훈련에 의한 관습적인 어휘들의 익숙한 반복이라 하더라도 모든 종교의 가장 거룩한 의례인 기도가 단순히 입과 혀와 호흡과 적당한 침이 뒤섞인 소음이나 소리가 아닌 것은 기도의 전과 후에 자연히 따라오고 앞서가며 이 안과 저 밖에서 우글거리는 이런 저런 무수한 기억들-진화의 장구한 사다리를 타고 전해진 유전적 본능의 것이든, 곧 소멸의 체념을 습득한 망각 직전의 강렬한 흔적이든-이 없을 수 없고 이를 배우고 가르치는 그대로의 언어와 몸짓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생각, 몽상, 사유, 묵상, 명상, 사색에 잠기다, 빠지다, 허우적거리다 등등 앞뒤 문맥에 따라 그 뜻의 폭과 깊이와 맛과 때깔이 다른 다양한 표현을 배치하고 배열한다. 미드를 보면 배경음악의 의도와 (느껴야 할)분위기를 자막..

글쎄 2021.01.31

의술과 정치, 말 짝짓기

정치, 종교, 국가 세 가지 항목, 각각을 뜻의 역사로서 외연의 경계와 뜻 자체로서 내포의 깊이를 따지고 들자면 무수히 다양하여 마치 구름이 스쳐가는 밤하늘 별들이 저마다 깜박거리며 빛나는 한 개의 점 같지만 그 점이 실은 수 천 억의 별로 이루어진 은하계인 것처럼 각각의 말을 감히 어떤 문장 안으로 끌어오는 순간 마치 블랙홀의 이른바 이벤트 호라이즌에서 머뭇거리다 자칫 헛디뎌 하나의 궁극적인 점으로 압축된다는 그 광대한 ‘없음’으로 하염없이 끌려 들어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혼돈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마련인데 이러한 두려움의 막연함(의 우발성)을 인정하면서 저 각각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저 셋을 서로 둘로 짝짓기, 예를 들어 종교와 국가, 국가와 정치, 정치와 종교로 일단 묶고 둘의 ..

글쎄 2020.09.13

이 여름 찹쌀떡 장수

유월을 지나 칠월도 지나 어느덧 팔월도 끝인데 하늘은 비 닮은 물을 구름 위로 붓고 구름 아래로 쏟고 구름 바깥에서조차 넘치는 소리가 지하철 공중화장실 변기물 내리는 소리보다 잦고 낯익어 질퍽질퍽 속옷에서도 흥건하고 졸졸졸 피부 안에서도 샘물처럼 흘러나오는데 느닷없이 그 언제였던 마른, 하늘 먼 바깥, 천둥소리보다 아스라한 찹싸알떠어억 메미일무우욱 장수 호객 소리가 연립과 다세대로 꽉 찬 가난한 골목길을 저벅 저벅 적시며 돌고 있다. 배달앱이 오토바이 요란한 배기음으로 스쳐 가며 그 목소리를 간간히 지우는 사이 반듯한 지름길 없는, 가난하게 숨 쉬고 가난하게 꿈꾸는 서울 평균 공시가 이하로 다시 가난한 골목 한 바퀴를 장마 뒤끝 가랑비를 맞으며 철벅 철벅 어느새 돌아 나오고 있다. 찹쌀-쌔애앵 코끝 매운..

글쎄 2020.08.31

우매한 한 걸음... 디지털 제스처

절간의 소 이야기 -백석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보다 영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이 있는 줄 안다고 수양산의 어늬 오래된 절에서 칠십이 넘은 로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산나물을 추었다. 로장: 나이 많고 덕행이 높은 중 추었다: 추렸다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라, 병은 소문내야 낫는다. 마치 탕약의 그것처럼 무겁고 왠지 선뜻 삼키기 조심스런 가르침인데 백석은 이를 소와 스님 간 이루어지는 묵언의 대화로 다시 한 번 살짝 데치며 부드럽게 되새김질하게 한다. 애초 알려진 (문화) 인류학적 거리두기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는데 그 중 이번 역병으로 재소환환 (사회적) 거리두기는 고통과 죽음의 치수로 환산한 그 값이 열 걸음 안팎이다. 그리고 저 열 걸음은 인류의 가..

글쎄 2020.08.02

꽃의 블루 쉬프트, 로벨리아

꽃의 이름은 로벨리아인데 이름의 그 유래를 구글링하기보다는 그냥 소확행, 앙징맞다고 해야 할 것(이겠지만), 코발트 블루 또는 프렌치 블루를 Lilac 경계에서 살짝 덧칠하기 전 어떤 이유로 잠시 머뭇거리는 그런 흔적으로 배어 있는 색감의 빛에 이끌리면 현생 우주의 최초와 소멸의 항구적 스펙트럼이자 우주적 팽창의 무한한 항적이 반짝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주창조 148억 년, 어느 여름, 어느 오후에 일어난 로벨리아의 미묘한 블루쉬프트(Blue-shift) 관찰기인데 꽃이 온몸으로 내뿜는 감각적 매력 중 가장 민첩하고 빼어난 전달꾼으로 알려진 광자가 알갱이의 두툼함과 파장의 투명성으로 나의 눈 깊숙한 저 안쪽에 퍼져있는 시신경의 미세한 표면을 정확하게 적중하며 일으킨 반짝-찌릿한 자극에 담긴 색감의 기..

글쎄 2020.07.06

기억 1, 눈의 해부도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화려하고 이국적이고 파격적인 자태로 뽐내는 선글라스를 그 단 한번의 순간에 어울리는 자리에 우선 배치한 후 오직 반짝이는 금빛과 은빛으로만 자랑해야하는 금속 테와 차분한 외관으로 단정한 검정 사각과 갈색 원형 뿔테들로 이따금 흘끗거리며 오고가는 시선들을 그 텅 빈 동공으로 마주하게끔 구색 맞추기로 가까스로 채운 산뜻하고 투명한 아크릴 입체 구조물로 거의 꽉 찬 투영적 공간-진열장의 바닥에는 청결과 정갈의 상징인 양 희고 부드러운 솜덩어리가 촘촘하게 깔려있는데 어느새 쌓인 지 보름은 거의 되었을 엷은 먼지를 희미하게 드러내며 노안용 납작 돋보기들 곁으로 철제 금속 테와 두툼한 검정 뿔테를 두른,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크고 탁구공보다 조금 작은 두툼하고 푸른 빛 나는 확대경 몇 ..

글쎄 2020.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