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복산 산행후기 07년

3월1일 그리고 나눔과 소통과 '서울', 169차

todayandnow 2007. 3. 8. 17:04

80여 년 전 31일 오늘, 당시 민중들이 가슴 터지도록 외친 아우성에는 일제 식민지 아래서 20여년에 걸친 이방인의 지배와 屈從에 대한 분노만 담겨있던 것이 아니라 절대 권력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저항력의 한계에서 오는 무기력감과 그 권력의 당위성으로 도입된 소위 근대화의 공세에 대해 일방적 수용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즉 당시 세계 변화의 추동력에 대한 총체적인 無知에 대한 각성과 고립감에 대한 끝없는 불안이 함께 어우러져 토해낸 처절함이 그 진정한 속내가 아니었는지.

 

귀청을 때리는 단말마적 비명은 아니지만 그 지속성에 스스로의 청각마저 포기할 정도로 저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고통과 환멸의 신음, 이를 즐기는 자본의 온갖 일회성 욕망으로 일주일 내내 난타당하며, 도주의 피로와 불면의 유랑으로 깊게 파인 주름.

 

그 주름 사이에 깊게 드리운 견고한 고독을 잠시 나마 깨고 나올 수 있음에

반가운 손짓으로 다가오는 해후의 광장에서 만난 산동무들.

 

허경, 범희, 창민, 효근, 헌모 등.

무위의 순치를 눈짓으로 확인하고 이내 광장 한쪽으로 난 출구를 향해 탈주하듯 오르나, 당신의 쓰디쓴 박탈감을 나의 당당한 권리로 등치시키고 당신의 깊은 모멸감을 나의 현격한 우월감으로 대치하는 요즈음 백주 대낮에도 횡행하는 일상의 정신 착란 유령들이 오랜 연인인 양 허리를 감싸 안고 한사코 함께 하잔다.

 

허나 탈주의 거리에 반비례하는 억압의 무게처럼, 흐르는 땀에 비례하는 경쾌함, 그 자유처럼 이제 저 초탈의 페르쏘나를 향한 한걸음 한걸음을 거역하지 못하고 제 스스로 물러서는 순간, 어느새 비봉 능선에 올라선 몸의 홀가분함에 활짝 펴지는 주름.

 

능선 아래 막 떠나 온 그 공간을 향해 돌아서서 하늘 한켠에 내어 달린 창문을 힘차게 열어젖히는 순간, 시야를 가득 채우는, 나지막하게 누운 낯익은 산들과 온갖 형상의 구조물이 함께 뒤섞인 서울의 풍광을 비껴 내려다보면서 주고받는 마디마디에 담긴 속내에는 예까지 올라오느라 흘린 땀과 가쁜 숨의 값으로 돌려받은 시각적 거리감으로 그 지긋지긋한 유령들과 비록 심리적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더라도 일단 격리되었음을 확인하고 내쉬는 한 숨소리에 담긴 울림의 깊이가 결코 얕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해서, 비록 지극히 짧고 아쉬운 시간이지만, 그렇게 얻은 절대 한가함을 침묵으로 환원하는 순간, 라이프니쯔의 모나드를 차용, 서울을 그냥 고유명사로서의 도시이름이 아닌 보편을 담은 객체로 위치시키고,

 

이제 그 서울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며 느릿느릿 흐르는 물빛을 하염없이 쳐다보면서 한 왕조의 오백년 도읍지라는 시간적 공간으로서 지니고 있어야 할 역사성마저 철저하고 매몰차게 뒤덮어버린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주는 비자연적 비인간적 이질감을 비()의식화하는 한편

나아가 우리 스스로 그 구조물의 일부로 강제 편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창조의 탈을 쓴 파괴의 무절제함에 은닉된 욕망 또한 그 곳에 사는 우리도 더불어 철저하게 내면화했음을 두말없이 그대로 인정하면

서울은 추상적 사유의 대상으로도 다가올 수 있고 도시설계가인 김석철이 그의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에서 강조한 공간으로도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

 

조금 더 나아가, ‘서울그 공간을 공유한, 하는, 할 모든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또는 종속되어야 할 이방인이 아닌 정당한 타자로 존재하고 소통하듯 서울또한 외지나 타지가 아닌 나눔과 포용으로 늘 법석대는 광장으로 다가 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구하며

원시적 형태로 전해오는 나눔과 소통의 초와 향을 피우고 산과 자연과 오늘 함께 못한 산동무들과 더불어 포용의 포옹을 함께 한 후 집으로 집으로.

 

일흔 더하기 아흔아홉번째 산행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