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vironment knows no borders!
지난 9월 말 길훈과 허경 등 셋이 오른 북한산 비봉 능선에서 세 명의 외국인 젊은이가 등산로 주변 쓰레기를 줍는 것을 보았다.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고 난 후 세 번째로 목격하는 ‘좋은 일’하는 사람들인데 외국인은 처음이었다. 허리춤에 찬 지자체 공인 쓰레기봉투에는 이미 캔과 비닐 등 각종 쓰레기가 담겨져 있었고 연신 등산로 옆을 두리번거리며 쓰레기를 찾는 모습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잠시 멈칫했다.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무엇보다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감동의 기쁨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 박수라도 쳐 주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구제 금융사태가 불러온 붕괴와 몰락의 두려움이 산 아래 모든 곳을 휩쓸고 가면서 폐허화시킨 일상, 그 간난(艱難)의 질곡을 피해 또는 더 잃을 것도 없는, 해서 몸만이라도 추슬러 보자며 산을 찾는 이가 부쩍 늘었지만 산에서 취사 행위를 금지하는 동시에 공원 입장료가 크게 인상되고부터는 예전처럼 쓰레기 줍는 것과 같은 ‘스스로 좋은 일’하는 이들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아니 사라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자신의 건강과 즐거움을 위해 산을 오르면서 그 산 안에까지 국가의 행정력을 끌고 들어와 규제되고 처벌받을 짓을 한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찌되었든 사람들은 국가가 입장료를 징수하면서 그리고 그 수입으로 동원된 공권력에 의해 쓰레기 버리는 것을 포함한 환경 파괴에 해당한다고 규정된 행위들을 늘 감시당하는, 즉 잠재적 예비 범법자라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탈속하는 순간 가장 비탈속화된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한편 그와 동시에 안타깝게도 좋은 일하는 이도 사라졌다는 것은 자율의 경계면에 통제가 맞닿아있다는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나 싶다. 감시와 처벌에 의해 추방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오히려 선이 아닌가 싶다.
결국 유아기를 벗어나면서 배운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의무 행위 중의 하나인 자신의 배설물 처리 행위가 국가의 감시와 처벌의 영역 안에 다시 편입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국가가 어느 날 , 즉 올해 초 갑자기 입장료를 전격적으로 폐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발표된 것으로 보면 국민의 땅인 공원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것이 그 취지다.
국가 재정이 튼실해져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인 만큼 국민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잘 보호하리라는 즉 국가의 또는 국민간의 대국민 신뢰지수가 몇 년 만에 갑자기 올라서인지 질문의 가짓수와 그에 걸맞은 대답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국가가 행정력을 동원해 국민의 호주머니를 털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단 전무후무한 선의로 받아 들일만한 조건은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조삼모사의 교훈이 여전히 유효함을 깨닫고 선의의 진정성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는 데는 단 한 달로 족했다. 불행하게도 그동안의 역사적(?)경험에 의해 늘 어떤 새로운 행위를 할 때마다 그 저의에 대한 의구심부터 앞서던 행위 주체의 기능과 의도가 바로 비난과 불신의 현실적이며 구체적 대상임을 다시 경험, 확인하게 된 것이다. 또한 행정력 즉 권력의 일방적 행사는 무능력의 은폐 또는 무관심의 조장 나아가서는 의무의 광범위한 방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쓴입맛 다시며 확인하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공원입구의 쓰레기 분리수거함이 사라진 것이다.
근 8년에 걸쳐 징수하다가 2년 가까이 기안 발의하여 시행하게 된 공원 입장료 폐지와 더불어 쓰레기 수거함도 폐기한 것이다. 입장료와 환경을 맞바꾼 셈이다. 그 이유를 공원 관리소에 물으니 돌아온 대답이 단 한마디다. 정부 시책이란다.
덕분에 이제는 등산로에서도 검정 비닐, 흰 비닐, 각종 플라스틱 용기, 깡통 등 쓰레기가 나뒹구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잔돈푼에 지나지 않는 현재 가치가 아까워 지금은 도저히 그 크기를 가늠키 어려운 환경이라는 미래가치를 포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서슴없이 정부 시책이라고 말하며 벌어진 입 다물란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국민을 위해서라는 시행했다는 입장료 폐지가 국가의 의도와 기능에 대한 의심과 불신에서 애매함과 모호함의 누명(?)을 벗겨내고 나아가서는 환경파괴라는 눈앞에 보이는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는 결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국립공원의 환경 보호는 국가의 감시와 처벌의 영역에서 국민들의 양심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라 주장한다. 참여인 것이다. 국가라는 존재가 물러나자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과 양심의 의무를 스스로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에 의해 판단 행동하는 호모사피엔스로 다시 출현한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달 만에.
그러나 여기까지가 아니다. 곰곰 짚어보면 의도는 분명하다. 그리고 의도가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물론 작위성의 강도가 영향을 어느 정도 미칠 것이다.
우리의 습관은 쓰레기는 집에서 밖으로 들고 나오는 것이다. 들고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비록 자신이 만든 쓰레기이지만 분리수거함을 걷어내면 적어도 일부 사람들은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버릴 것임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따라서 여론은 호모 에렉투스의 등급 수준으로 매길 만큼 무책임한 불신의 동물군집으로 자조하도록 조장된다. 그리고 다시 국가의 개입을 재촉한다. 무능함의 일방성은 효율성으로 치장되고 의무의 방기는 자조적 여론에 의해 국민에게 책임 전가된다. 국가는 통제력을 발휘하며 자연은 가장 비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감옥화되어 보호된다.
지금도 가장 못된 사람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즉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영역에서는 직무 유기에 다름없는 짓을 하거나 오히려 환경 파괴에 앞장서고 있다는 주장도 여전히 강력하게 유효한 의심의 대상, 그 윤곽을 뚜렷이 그려내는 작업과 하는 짓에 대한 현실적 대응 방법론의 수립과 직접적 실천의 중요성이 매번 산에 오를 때 마다, 그리고 나뒹구는 쓰레기를 볼 때 마다 새삼스럽다.
아무튼 세 외국 젊은이들처럼 산에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 그들을 만날 때 마다 느끼는 수오지심에 얼굴 붉히며 산에 오르는 모든 이가 마침내 모두 함께 벅찬 품앗이에 동참하여 계몽시대 수준의 권력이 생색내며 매겨준 호모사피엔스 등급을 이 기회에 21세기에 걸맞게 Homo knowledgian 또는 Homo movence로 진화, 자리매김하는 날을 고대하며 미국 어느 대학 총장이 한 말을 빌려와서 어휘를 바꿔쳐 써 먹어본다.
"산은 거기에 오르는 사람을 등산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등산객을 사람으로 만드는 곳이다."
일백 여든 다섯 번째 산행 잡기 (2007. 9. 30)
이후 산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을 눈치 채지 않게 다가서서 부딪치다보면, 그들이 힘들게 오르며 얻으려는 건강의 목적과 동기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곤 한다.
일상에서 거듭된 탐욕의 과잉과 본능의 무절제함이 가져온 정신적 황폐함이 주는 위기감에 몰려 허겁지겁 도피하는 경계의 눈빛으로 번득거림에 마주쳐 스침이 반가움이 아니라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의 반복이고
건강은 특히 신체적 건강은 인간의 본유의 빛나는 내면을 즉 심(혼이든 정신이든)을 담는 그릇으로 이는 신뢰와 아낌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임에도 이는 가볍게 무시되고 그냥 동물적이며 한시적 속성이 뚜렷한 근에 대한 육의 비대칭적 과잉에 몰두 자신의 건강, 몸을 스스로 또 다른 자본주의적 소비상품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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