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북한산을 가려면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을 다시 관통하는 다리를 건너는데 그 중 자주 이용하는 다리가 한강대교다. 애초 외다리이다가 늘어나는 교통량으로 인해 다른 다리들처럼 쌍둥이 다리가 되었는데 위쪽에 놓여 강북으로 가는 다리가 옛날 다리다.
다리가 하나일 때는 애초 이쪽과 저쪽을 잇는, 분리와 수렴을 매개로 하는 일차원적인 평면적 소통을 위한 도구적 효용성만이 뚜렷했다.
그런데 외양의 동일성을 반복하며 ‘의도’된 착시효과를 강조, 둘을 하나로 지칭하게 하지만 일단 다리 안에 들어서면 정적 병렬을 거역하는 동적 흐름의 상호 역진성이 주는 공시성이 너무 쉽게 포착될 뿐만 아니라 다리를 건너는 중에 는 이러한 역진성을 그 방법으로 유비하며 망각의 성감대를 자극, 외다리 시절의 퇴행성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이른바 새것을 대위하여 옛것을 새롭게 하는, 속된 통시성의 연장이 비록 잠깐이지만 유효하게 작동하는 동안, 쉽지 않게 ‘오해’하면 ‘뒤죽박죽’이고 복잡하지 않게 ‘이해’하면 ‘顚倒와 專有’가 일어나는데,
맞은 편 다리 위로 스쳐가는 구로동 종점 행-아마 114번- 빛바랜 페인트, 낡고 딱딱한 의자, 담배연기 가득한 시내버스 안에서 침흘려가며 꾸벅꾸벅 조는 흑백 교복 담은 흑백사진이 이 편 다리 위를 달리는 에어콘 바람이 시린 도시형 버스 유리창에 비친 등산복 차림의 아침 잠 덜 깬 중년의 결코 부드럽지 않은 주름을 뜯어보듯 세밀하게 묘사한 동영상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수십년의 시간적 격차를 역모자이크로 처리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일치가 우연의 순박함을 앞세운 詐術의 강요가 아님을 합법화할 수 있고 영속성이 순간들의 교만을 은폐하는 허구적 과장에 포획당하지 않았다는 고백 또한 여전히 참이라면 ‘시간’을 이제 푸코의 이른바 지식의 고고학의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고고학’의 대상, 즉 ‘시간의 고고학’을 표제 삼아 시간의 ‘시작’을 바로 이 지점이라고 우겨도 절로 함께 가는 나이를 ‘질러간다’는 비난이 그리 아프지는 않을 듯싶다. 중복에 때맞추어 식은 땀 헛소리에 마른 침 넘기며 입맛 다신다고 해도.
'글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창 체육대회 (0) | 2008.06.08 |
---|---|
해가 거듭할수록 (0) | 2008.01.29 |
'현모양처'와 옥시덴탈리즘 (0) | 2007.07.30 |
까마귀밥과 쥐불놀이 (0) | 2007.02.10 |
알파인, 알피니즘의 어원은... (0) | 2005.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