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바대로 근대적 의미의 등산은 알프스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등산'을 뜻하는 '알피니즘(Alpinism)'이란 말도 '알프스(Alps)'가 그 어원이 된다.
초창기에는 등산이라고 하면 준비 단계에서부터 여러 달에 걸쳐 많은 인원과 많은 준비물이 투입되는 일종의 장거리 모험 여행 같았으나 이후 현대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훨씬 강하고 가볍고 편리해진 각종 등산 장비와 운송 수단 덕에 요즈음은 한두 사람이 가벼운 차림으로 하루 혹은 며칠 만에 산을 오르는 이른바 '알파인 스타일' 등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두서너명이 하는 등산인 알파인 스타일이 사실은 맨 처음 시작된 등산 방법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면 이 알파인 스타일, 즉 최초의 근대적 등산이 시작된 18세기 당시의 일화를 들어 보기로 한다.
(여기 저기에서 퍼와 짜깁고 덧붙임)
지금부터 150여 년 전인 1760년 제네바의 부유한 귀족 가문집안에서 태어난 젊은 자연 과학자인
드 소쉬르(de Saussure)는 빙하와 몽블랑을 관찰하기 위해 샤모니라는 작은 산간 마을에 도착한다.
몽블랑에 대해 끊임없는 자연 과학적인 호기심을 지닌 당시 20세였던 이 젊은 과학도는
이후 20여년에 걸쳐 셀 수도 없이 샤모니를 방문, 과학자의 시야로 갖가지 자연과학적 관찰(기압과 온도의 관계, 습도와 시야의 관계, 빙하의 방향, 산맥의 흐름 등)과 실험을 하고 그 결과치를 반영,
최초로 몽블랑 지도와 산세를 스케치하며 여러 차례 등반을 여러 루트를 거쳐 정상 등반로를 찾으려
시도하나 번번히 실패하곤 한다.
20여년을 이렇게 보낸 소쉬르는 스스로 등반로 찾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다른 사람이 정상 루트를
찾아 주기를 기원하며 큰 상금을 내거는데
마침내 1786년 이 봉우리 정상에 첫 발을 내디딘 이들은 둘 다 샤모니 출신으로
젊은 의사 미셀 가브리엘 파까드(Michel Gabriel Paccard)와 수정 채취업자인 쟈끄 발마(Balmat, Jaques)였다.
파까드는 이태리 토리노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돌아와 고향마을에 정착한 후,
산에 대한 자연 과학적 관심을 그 주된 동기로 하여
1783년 부리와 함께 몽블랑 등정을 시도하였으나 불화로 실패한 것을 비롯해
1775~1784년까지 9년 동안 모두 3차례나 몽블랑 등정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발머는 1786년 6월7일 소쉬르가 상금을 내걸자 이를 목적으로 꾸려진 두 개의 등산대 중 한 사람으로
참여 하는데 이 때 한 팀은 샤모니에서, 다른 한 팀은 셍 제르베에서 출발을 하여 에귀 뒤 구테(Aiguille du Gouter) 정상에서 합류하기로 하나 샤모니에서 출발한 등반대가 먼저 도착, 애초 약속을 무시하고 곧바로 정상을 향하나 그 뒤를 따르던 셍 제르베를 출발한 등반대원 가운데 유달리 뛰어난 체력을
소유한 발마가 혼자 샤모니팀을 앞질러 올라가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제일 먼저 정상을 오르는 사람이 가장 많은 상금을 타는 일종의 목숨을 건 게임이었으나
점점 험해지는 날씨에 다른 사람들은 중도에 포기하면서 앞서간 발마에게 욕을 퍼 부으며
하산을 한 반면 발머는 홀로 계속 오르다 정상 근처에서 악천후로 결국 포기, 홀로 산에서
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샤모니로 돌아온다.
사냥과 수정 채집으로 어렵게 먹고 살던 발마는 산에 관한 한 타고난 감각을 지녔으나
과묵하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다른 산악 가이드들과는 단지 경쟁 상대자였다고 한다.
전해진 바로는 오직 자연과학적 관심에서 몽블랑을 오르고자 했던 파까드가
홀로 산에서 밤을 새우고 무사히 돌아 온 그의 경험과 체력을 높이 평가,
상금은 발마 혼자 차지하는 조건으로 동반 등반을 제의했다고도 한다.
후에 파까드는 발마의 여동생과 결혼한다.
마침내 각기 다른 목적으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8월 7일 오후 3시, 샤모니를 출발, 밤 9시 쯤
몽따뉴 드 라 꼬뜨(Cote) 정상 부근(2.392m)에서 비박(bivauac)한 후 다음날 새벽 4시에 출발,
다섯 시간 만에 보송 빙하와 타꼬나 빙하가 합치는 곳을 지난다.
자일(seil)도 없이 크레바스(Crevasse)를 건너고, 8월의 뜨거운 햇빛에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눈덩이 위를 지나자 곧 이들 앞에는 눈 덮인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두 시간 만에 미끄러운 눈 언덕을 요즘처럼 아이젠(원명은 스타이그아이젠: steigeisen 또는
영어로 Cramp-on)도 없이 오직 지팡이에 의지해 오르게 된다.
해발 3,900m에 달하는 언덕을 오르자 펼쳐진 1Km에 걸친 눈벌판을 거센 바람을 헤치며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럿셀(russell)하며 한 발 한 발 떼어 놓는 강행군으로 나가다
결국 앞장섰던 발마가 지쳐 쓰러지자 파까드가 그의 짐을 받아 다시 앞으로 나선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눈벌판을 벗어나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바위 마루터기(로쉐 · 루지)로 들어서
온종일 햇볕이 들지않아 얼음에 덮인 이곳 역시 자일과 아이젠 없이 가까스로 넘어서서
마침내 발마와 파까드는 4,807m의 몽 블랑 꼭대기에 올라서게 된다.
시간은 1786년 8월 8일 오후 6시 32분으로, 2.392m의 비박했던 곳을 떠난 지 14시간 30분만 이었다.
그들은 파까드가 지팡이로 쓰던 긴 막대기를 세우고 거기에 빨간 천을 매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파까드는 어렵게 가져간 기압계를 이용, 기압 등을 측정하며 30분 간 머문 뒤 하산하게 된다.
허기와 불면으로 인한 피로에 동상과 고산병까지 겹친 가운데 달빛 아래서 사투를 벌이며 4시간 30분 후 발마는 설맹에 걸린 파까드의 손을 잡고 가까스로 생환하게 된다. 집으로 집으로...
더불어 알파인이란 역사적인 어휘도 탄생하게 된다. 사즉생!!!
상금 제공자인 소쉬르도 오르다.
발마와 파까드가 초등정에 성공한 그 다음해인 1787년 당시 나이 48세의 소쉬르도 발마와 함께 몽블랑 등반을 시도한다.
발마의 초등 성공 후 곧바로 등정을 시도하려 하였지만 짓궂은 날씨 탓에 일년을 기다린 소쉬르는
18명의 가이드를 동원해서 그와 청춘을 함께 한 온갖 과학연구의 장비들과 그를 태우고 올라갈 수 있는 가마까지 포함된 대규모의 등반대를 구성, 8월 2일 선두에선 발마와 두 명의 가이드의 길안내를 받으며 수많은 장비와 가마를 걸머진 가이드들과 함께 마침내 정상에 오르게 된다.
아울러 1787년 8월 2일, 이 날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큰 기록을 남기는 역사적인 하루로 새겨진다.
소쉬르는 등반 도중 곳곳에서 만년설을 연구용 샘플로 채취하여 몽블랑 정상을 구성하는 눈의 요소와
고도에 따른 하늘의 색깔변화를 기록으로 남기는 한편 그가 발명하여 오늘날도 이용되고 있는
모발 습도계로 습도를 측정하는 등 그의 집요한 탐구와 열의는 자연 과학의 소중한 자산과 감동으로
전해내려 오게 된다.
고산에서는 물의 비등점이 섭씨80도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불과 32미터의 오차밖에 보이지 않은
몽블랑 정상의 고도 계산은 아직도 많은 과학자들에게는 당시의 과학 측정 장비 수준으로 볼 때는
경이로운 발견으로 여겨지고 있다.
1832년 어느 날,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등으로 유명한 독일의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는
샤모니 계곡을 방문하게 된다.
당시 나이 70의 고집스런 노인으로 늙어버린 쟉 발마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1786년 여름 파까드와의 드라마틱하였던 몽블랑 등정 이야기를 뒤마에게 하고 뒤마는
그의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발표하고 이후 이 이야기는 몽블랑 공식 초등 산행후기로 전해 내려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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