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쓰고 영어로 번역했거나 영어로 쓴 것을 한글로 번역했거나... 번역이 전달하려는 어떤 뜻의 그 흔한 알쏭달쏭함 그 자체마저 즐겁게 누릴 수 있음을 알려준 오랜만에 만난 '빼어난' 번역...
"" 전 핏헤드라는 지역을 처음 들어봤어요." 수요일 저녁 모임 여자가 말했다. 자그마하고 갈대처럼 가냘픈 메리 돌을 보면 조각칼이 무른 나무를 도심질하듯 술이 그녀의 몸을 도려낸 것 같았다. 큼직한 밤색 눈 아래 뺨은 푹 꺼졌고, 짙은 갈색 머리는 피골이 상접한 몸 위에 빌린 가발처럼 달려있었다. 메리 돌이 겨우 스무네 살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애그니스는 할 말을 잃고 심장에 손을 올렸다. 세상에는 자기보다 힘든 사람들이 늘 있다는 리지의 속삭임이 귓전에 맴돌았다." (387쪽)
여전히 현대 기계 문명의 모습을 이끄는 저 산업혁명의 물질적 에너지의 원천이었던 폐광에는 한때의 흥청망청 추억들이 유령처럼 떠돌아 다니고, 찬란하게 착취하고 영광스럽게 수탈하던 제국의 그 언제가의 그 어느 곳으로 돌아가곺은 욕망으로 허기진 택시들은 타락한 외설을 호객하며 거리와 골목들을 배회하는데... 빠져나올 수 없는 빈곤과 채울 수 없는 결핍을 잠시 지연시키고 잠깐 마비시키는 지독하고 집요한 알콜 중독의 그 달콤하고 몽롱한 환각이 어김없이 그 댓가로 요구하는 배신과 좌절과 회한의 아리고 쓰린 고통 그리고 되새김인양 멈추지 않는 구토들 ... 이어 치유 불가능성으로 동기화하는 가족의 재앙적 해체 그러나 곧 단호하게 거부하는 최초의 몸짓이자 최후의 유대감에 관한 투명한 속삭임...
"이탄 습지를 걸어가는 내내 셔기는 자꾸만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집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창가에 서 있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뒤돌아봤다. 얼어붙은 개울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며, 어머니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갈지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았다. 취하든 안 취하든, 어머니가 늘 똑같은 일상에 갇혀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셔기는 쉽게 부스러지는 부들의 꽃이삭을 두드리며 슬픔이 오늘 어머니를 잠식할 것인지 생각했다. 얼어붙은 부들은 바싹 말라 있었고, 꽃이삭을 톡톡치면 씨앗들이 조그만 낙하산처럼 날아 올랐다. 둥실 떠올라서 동네를 향해 날아가는 씨앗들이 작은 유령들의 행진처럼 보였다. 셔기는 사랑한다는 말을 유령에게 속삭이고, 손가락으로 튕겨서 어머니에게 날려 보냈다."(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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