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산행기

한그루 나무도 때가 되면...

todayandnow 2011. 11. 6. 16:51

 

 

길이 깊으면 산도 한적하다.

 

복산회 초창기로 기억된다. 애초 산행을 중원산으로 잡았다가 입구에서 산불 예방 입산 금지로 막혀버린 탓에 혹시 하는 기대로 가까운 용문산으로 갔던 적이 있다. 용문산도 당연히 입산금지였는데 마침 그 유명한 은행나무 옆으로 샛길이 비스듬히 보여 옳지 싶어 들어섰다가 내내 가파른 비탈로만 기어올라 꽤 고생한 적이 있다. 그 때 중간쯤에서 심히 지친 창민이 털썩 앉으며 던진 한 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산이 싫소이다.' 허나, 증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으니 이후 오히려 아주 훌륭한 약이 되었고 그 때 함께한 여럿들은 여전히 그렇게 여긴다.

 

그 날이 엊그제 같것만, 2003년 10월부터 시작한 48복산회 산행후기에 기록이 없으니 대충 10년 전 즈음인 건 맞다싶다. 당시 굳이 중원산을 모셔-잡은 까닭은 몇몇 동기가 산우회라는 명칭으로 모여 정기적으로 다니기 전, 준제, 창호 등이랑 이따금 북한산이나 검단산 또는 관악산 등을 다니던 중 처음으로 이 산을 오르며 감탄한 다름 아닌 산내음-山臭 때문이다. 산이 비단 그 모습뿐만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체취, 내음을 품고-뿜고-흘린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난생 처음 몰래 훔쳐 맡은 첫사랑의 그 여리고 풋풋한 살내음을 굳이 기억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찾으려는 수고도 얼추 비슷한 까닭아닐까.

 

창호와 용산역에서 만나 8시 45분 출발, 소문난 대로 이미 용산 지나 두어 정거장부터 빈틈없이 가득 찬 중앙선 전철, 상봉역에서 준제 반갑게 합류, 용문에 도착하니 10시 반이 조금 지났다. 역 앞에서 늦은 아침 덕에 더욱 맛난 소고기된장찌개를 먹으며 언제나 예외 없이 식당 아줌마와 반주 주고받으며 수작하는 준제 입담에 키득거리고 맞장구친 값으로 하루에 5번만 운행하는 중원산행 버스를 5분전에 떠나보내고 용문 토박이 택시 기사의 구수한 덕담과 지역경제에 대한 생생한 브리핑을 듣는 잠깐 사이에 입구에 내려섰다.

잠시 오르니 우리가 놓친 버스에서 내린 듯 한 젊은 여자 하나에 또래 남자 셋이 어우러진 한 무리가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른다. 남자 셋과 이미 어울렸으되 아직 제대로 섞이지 못한 듯 왠지 어색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한적한 산길의 깊은 맛을 고스란히 훼방 놓을 것이 뻔 하다는 삼구동성.

해서 정상에서 계곡을 타고 내려올 셈으로 옆 산길로 빠져드니 그윽하고 깊은 그리고 부드럽게 취하면서 깨어남을 서두르지 않는 산내음에 온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맡기니 나무와 풀과 돌과 흙에 서로 스며들어 너나없이 녹아듦이 영원히 일체로 향해 다가가는 lim(x->무한소)공식이고 空卽是色이 그 항등식이다.

 

오르는 길목 곳곳이 그냥 아담한 쉼그늘에 지나지 않는데 시선에 꽂혀 들어오는 공간을 향한 상상력은 오직 나만의 아늑한 커플 침낭, 아니 꿈꾸는 일탈의 원룸-텐트로 이중 번역되는 모드다.

'모든 농담은 성적이다’라는 프로이트의 금언을 본능처럼 되새긴 그런 기대의 언설과 과거의 잡설이 뒤엉킨다. 이어 '당장 다음'이면서 결국 늘 '언젠가는'으로 좌절되고 마는 다짐이 뒤따른다.

환원불가인 '그 여자와'의 교환 가치적 결합의 '비'오류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이 남자만'의 사용 가치적 욕망의 쾌락충동을 붉디붉은 단풍빛에도 낯부끄럽지 않게 그냥 반복하는 것이다. 비아그라의 소비량과 한의대의 입학성적순위는 그래서 반비례할 수밖에 없음이란 뜻으로 읽는다. 그리고 조금 더 삐딱하게 읽어준다면 가타리가 말한 '욕망은 편력하는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이다.

 

능선을 만나 잠시 숨 돌리고 오르니 길이 만만치 않다. 꽤나 가파른데 수북히 쌓인 낙엽에 사람 발 디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을 보니 통상 다니는 길은 아니다.

방금 전 까지 산길 공해라고 타박한, 빛바랜 리본을 이제는 띄엄띄엄이나마 달려있음에 반갑고 고마워하며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더미를 조심스레 헤쳐 밟으며 바위를 부둥켜 안고 타다가 다시 나무뿌리를 잡아당기며 네발로 가쁘게 오르니 나무 하나에 무수히 많은 리본들이 뭉텅지어 매달려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쉬운 길이 달리 있다는 표식이다.

 

여하튼 '편리‘한 길에서는 그 흔적마저 사라진 모험과 놀이의 Nomad다운 길을 간만에 잠깐 맛 본 셈 아니냐며 세월 흘러 느슨해진 힘줄을 슬쩍 꼬집어본다.

정상에 올라서니 동서남북에 의지함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사방이 탁 트인 풍광이다.

다시 한 바퀴를 도니 좌 우 상 하가 만나 모든 만물을 감싸안는 地天泰卦의 파노라마를 이룬다.

 

내려서는 길, 밟기에 아까울 정도로 고운 단풍잎 비단꽃길이다.

계곡에서 준제의 '와잎 자랑거리’인 술-혀끝에서 감칠 듯 녹는 복분자주에 창호가 정성껏 기다리며 사 온 한 줄에 3,500원짜리 비빔 김밥을 안주 삼아 지난 세월에 쌓인 살가운 때 한 꺼풀씩 벗어내며 무심으로 듣다 이따금 유심으로 맞장구치니 산중 가을 또한 그렇게 비어가며 거듭 채워진다. 늘 돌이키며 아끼고 살릴 것은 고이 길러내되 지워 버려야 할 것은 서슴없이 지워서 또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 나간다는 뜻으로 溫故而知新을 풀이하는 까닭이다.

 

종점 옆 주막에서 주인이 직접 길렀다는 달디단 노란 배추속에 담긴 푸근한 인심 안주에 막걸리 한잔 걸치고 버스 그리고 무궁화타고 청량리에 내려 역앞 건너편 참 오랜 골목길에서 가볍게 한잔하다.

 

2011년 10월 22일 용문 도일봉

 

준제와 창호, 친구다. 오랜 친구다.

 

 

 

한그루 나무도 때가 되면 이렇게 절절히 타오른다.


 

 

낙엽이 칭송받는 것은 때론 버림에 대한 엉뚱한 앙갚음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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